자비로운 해석과 허수아비 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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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증: 논거와 논지의 쌍

읽는 이나 듣는 이에 따라 글이나 말이 다르게 해석되거나 평가될 때가 있습니다.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보통은 논증 자체가 명확하지 않은 탓이겠지만, 논증에 사용된 전제들 가운데 드러나지 않은 게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자신에겐 너무도 당연해 메신저가 굳이 하지 않은 이야기도 있을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숨은 전제가 논란을 불러오기도 합니다. 사람 생각이 다 비슷하진 않을 테니까요. 또 같은 단어가 다른 뜻으로 사용되는 사례도 흔합니다.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는 자유민주주의와 좌파 사상을 허용해선 안 된다는 자유민주주의가 동일한 개념일 순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허수아비 공격

논거에서 논지로 이어지는 논증은 이렇게 숨겨진 전제를 찾고 용어의 의미를 분명히 하는 절차를 거치며 비로소 해석됩니다. 이 과정에서 똑같은 주장을 두고 여러 의견이 부닥치는 경우도 생깁니다. 만약 메신저가 토론의 상대라면, 효율적인 논박을 위해 그 논증을 약하게 하려는 충동을 자연스레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다 자칫 상대를 힘 못 쓰는 허수아비처럼 만들어 비판하는, 이른바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를 저지르게 되기도 하지요. 하지만 토론이 승패를 가리는 논쟁이 아니라 더 나은 결론에 이르기 위한 것임을 헤아리면, 그렇게 이겨 뭐 하나 싶은 마음이 들 수도 있습니다. 바라건대 말입니다.

자비로운 해석

‘허수아비 공격’의 대척점엔 ‘자비로운 해석’이 있습니다. 숨은 전제를 찾거나 단어의 의미를 따질 때 논증이 더 강해지게끔(좋아지도록) 하는 거지요. 자비로운 해석 다음엔 날카로운 비판과 치열한 토론이 이어집니다. 여기에 참여하는 이들은 함께 성찰하며 성장합니다. 서로 대립하는 견해 중 하나를 채택하고 다른 하나를 기각하는 단순한 방식이 아닙니다. 창의적 혁신을 이뤄낼 수 있는 과정입니다. 좀 이상적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성찰의 교류

물론 모든 메신저나 메시지가 자비로운 해석의 대상이 될 순 없습니다. 강준만의 표현을 빌리면, 성찰의 교류는 같은 패러다임을 공유하는 이들 사이에서나 가능한 법일 테니까요. 이를테면, 저는 혐오 발언을 일삼는 사람들의 주장을 자비로운 마음으로 봐줄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동료들끼리는 자비로운 해석의 원칙을 헤아리면 어떨까 합니다. 불필요한 상처를 주고받는 일도 피할 수 있으면 좋겠고요. 우리가 원하는 변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덧붙이는 말

자비로운 해석이 한가롭거나 비현실적 이상주의처럼 비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이라는 땅에 서서 이상이라는 하늘을 쳐다보며 걷는, 현실적 이상주의자가 되어야 끝내 원하는 길로 갈 수 있지 않겠나 싶습니다. 자비로운 해석의 원칙이 제겐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편입니다.

2년에 한 번, ‘글쓰기와 연구윤리’라는 과목을 강의합니다. 논리학 공부도 살짝 하는데, 그때 학생들과 최훈의 ‘논리는 나의 힘’(우리학교)을 읽습니다. 거기에 나오는 논증 평가 흐름도를 아래와 같이 다시 그려봅니다.

논증 평가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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